작년 2월 초 Sabbaha 데뷔공연 이후로 사실 트위터에 어쨌다 저쨌다 혹은 인스타에 관객여러분 함께한 밴드분들 공연관계자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외에는 딱히 후기글을 장황하게 남겨 본 적은 없는데, 이번 공연은 일단 몇가지 적어볼 점이 있어서 후기를 작성하게 됐다. 그만큼 다른 공연에 비해서 더 강한 생각이 남았고, 열심히 준비했다는 뜻이 되겠다.
5월 30일, 춘희에서 열린 하드코어섹스 공연을 보고 있던 중, 인스타로 DM이 왔다. 다른 분의 인스스를 통해서였는지, 인스타 광고를 통해서였는지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이전부터 제니의 인스타는 팔로우 하고 있었고, 이런 분도 있구나 하고 있던 차에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오다니 참 놀랐었다. DM 하느라 약간 정신 팔려서 제대로 공연 못본 순간 도 있었던.
아무튼 제니는 그로부터 2주 뒤에 한국에 오는 일정이었고, 정말 어지간한 경우 아니면 대부분은 3-4주 정도 먼저 공연기획을 올리던 나에게 있어서는, 그것도 그냥-어느정도 컨셉을 잡고, 베뉴와 컨택하고, 밴드들 모여서 본인들 평소 레퍼토리를 하거나 즉흥음악을 하는게 아닌--명확한 컨셉과 퍼포먼스가 어우러진 공연을 해야하는 고관여 공연을 이렇게 단시간 내에 잡는 것은 정말 커다란 도전이었다.
고강도의 줌미팅, 컨셉&기획 디벨롭, 포스터 디자인과 로케(베뉴)헌팅, 일정조율은 솔직히 말해 정말 힘들었지만, 그냥 도전 해보고 싶었다. 하기로 한 건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 게 크기도 했고. 평소 내가 공연기획을 얼마나 훌러덩 올리는지도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공연의 기획과 컨셉에 대해서 설명 했을 때, 일관적으로 쭉 말이 되는 무언가가 되길 원했다. 사실 음과 양을 잘 아는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트라우마에 대해서 먼저 얘기했다. 서로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내 트라우마의 어떤 부분은 내가 느끼는 것 보다 크게 공감해주기도 했지만) 이런 트라우마를 어떻게 다루고 싶었고, 이내 음과 양이라는 컨셉을 빌려 이야기하는 걸로 진행 되었다. 기획 초창기에는 빈 몸이라는 clean slate(양? 선?)에 트라우마라는 검은 칠(음? 악?)이 거듭되면서 뭔가 양 극단의 중간, 그 밸런스를 얘기해보는 게 어떤가 싶었지만, 그건 음양을 제대로 표현한다기엔 거리가 있었고, 결과적으로는 제니의 몸 위에 흰색 그림 (양) 검은 그림 (음)을 같이 그리고, 어떤 트라우마 뿐 만이 아니라 관객이 참여해서 단어와 선을 그려 응원이 될 수도, 상처가 될 수도, 사랑일수도, 하는 어떤 중간 형태를 그려서 표현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했다. 어찌되었든 극단적인 음도, 극단적인 양도, 완벽한 밸런스도 존재할 수 없다-현실적으로 내가 안전함을 느끼는 중간의 회색지대 어딘가를 몸 위의 그림과 선을 지워 번지게 하자는 아이디어도 있었다.
음악적인 면에서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는 어렴풋이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내가 굉장히 어둡고 지저분한 소리를 내는 편이니, 밝고 맑은 소리를 직관적으로 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건 영안 님으로 곧바로 결정 되었다. 이전에도 사바하에 여성보컬을 찾고 있었고, 한 번 합주를 했었고, 그보다도 작년 6월 중력장 오픈마이크 에서 공연을 봤었기 때문에 내 생각엔 좋은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제니도 영안님의 영상과 퍼포먼스를 인스타로 확인하고 바로 음과 양의 신이라는 컨셉을 세우기 시작했다. 제니는 인간을 상징하는 제니에 대비해서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디렉팅을 했고, 결과적으로는 나는 25년만에 치마를 입게 되었다.
공연을 올릴 공간도 당연히 필요했다. 보통은 공연장을 먼저 확보 한 다음 기획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건 반대의 경우였다. 공연을 예정한 날짜가 점점 다가오는데도 공연장이 확정이 안된 상황에서 (여전히 내 머리속에서 처리가 안되는 개념ㅋㅋㅋ;;;)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호스트로 도와주시기로 한 하린 님과 여자친구분인 안마루님이 결과적으로 무대륙 이라는 내 기준에서는 좋은 의미로 말도 안되는 공간에서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연결을 해주셨다. 그 후로부터는 소품이나 화구 등을 지르기 시작했다.
공연 시간이 45분씩 2번으로 총 90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전에 진행했던 여러 즉흥음악 공연은 나 포함 2명 이상의 악기 연주자와 함께 했었는데, 90분이란 시간은 사실 부담이 컸었다. 이전 저주파 8탄 공연에서야 6명이 2시간 동안 3 세션으로 나누어서 진행했지만 (그나마도 계획은 4 세션이었음) 이번엔 영안 님의 보컬 외에는 내가 모든 걸 다 해야 하는 것이었다... 가지고 있는 악기를 거의 전부 가져 갈 생각을 하고, VSTI는 공연에 쓸 패치를 몇 개를 더 만들었다. 그나마 공연 몇일 전 닻올림 즉흥협연 때 어느정도 더 연습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 (집에서 연습하면 되잖아 라는 못된 말은 금지)
아무튼 시간이 흐르고, 결국은 공연 날이 찾아왔다. 전날 신촌 딥퍼플에서 공연 을 마치고 85% 정도 탈진한 상태에서 컨디션이 그다지 좋진 못한 상태로 공연 하루 전날까지 줌미팅을 하고, 공연하러 서울 가는 길에도 문구점에 들러 화구를 사는 정도로 모든 준비가 만전은 아니었다. 예매 상황으로 봤을 때 완전한 적자였고, 어느 정도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겁고 의미 있는 공연을 하자는 생각이 더 커졌다. 근데 뭐 그건 사실 언제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공연 내내도록 그렇게까지 많이 떨리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어차피 망하면 망하는거고... 가장 긴장된 건 공연 시작 전 까지 무대 세팅을 다 못 마칠까봐 였던 것 같았다. 정말 많은 도움을 주신 마루님 덕분에 제 시간 내에 세팅과 사운드체크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무대륙 공간은 어떤 표백된 공간처럼 세팅되기 시작했다. 검은색 바닥, 흰색 벽. 그리고 제니를 향해 집중된 조명, 그 외엔 전부 어두운 공간.
생각보다 음량을 크게 내지는 못했다. 큰 볼륨이 제니에게 어떤 부담을 주는 것 같았다. 평소 사바하 둠메탈 공연은 물론이고 일반적으로 했던 즉흥음악 공연보다도 훨씬 훨씬 볼륨을 낮춰서 연주했다. 믹서로 가는 맥북과 마이크는 어차피 마루님이 볼륨을 조절해주실테니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고, 기타와 베이스앰프는 제니와의 몇 번의 조율을 거쳐서 적정? 에 가까운 볼륨이 되었다. 근데 내 기타가 애초에 B튜닝 기타였던게 어떤 문제점으로 다가온 것 같기도 했다. 로우B 스트링이 울릴 때 나는 (나는 너무 좋아하는) 그 소리가 무언가 큰 압박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 보였다. 난 퍼즈나 디스토션도 안썼는데 흠.
하린님이 만든 공연소개 사운드와 신과 인간의 문답 파트가 너무 감각있고 좋게 느껴졌다. 역시 선생님!
일단 공연이 시작된 후에는 영안님의 눈치를 많이 보면서 시작하려고 했다. 치찰음과 호흡 소리를 위주로 음을 구성하고 계셨고, 나는 그에 맞춰 단소를 꺼냈다. 리허설 때 잘 나오던 단소 소리가 갑자기 왜 안나오는지... 물론 이 또한 어떤 언어였고, 그래서 영안님은 좀 더 호흡소리 (단소 삑사리 소리같은)로 대응해주셨다. 그 후엔 미니무그를 패드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맞나) 단소, 싱잉볼, 징, 오고무북 등등으로 점점 큰 악기를 꺼내가면서, 또 나도 같이 노래를 부르면서, 10분에 한 번씩 빨래판을 긁어서 어떤 타임 시그널을 주려고 했다. 호흡소리로 시작된 둘의 연주는 내가 악기를 바꿔가면서 더 더욱 큰 에너지로 서로 피드백 됐고, 긴장의 강도는 강해졌다. 영안님은 감사하게도 내 소리에 최대한 맞춰가면서 소리를 내주셨다. 나도 생각나는 한도 내에서는 잼 하듯 비슷한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다. Triocracy 에서 처럼 징과 보컬, 다른 악기의 루프를 통해서 빌드업을 하려고 했고, 생각보다 옆에 영안님 보컬이 같이 끼어들어가면서 어떤 딜레이 효과도 생겨서 재밌었다.
오고무북을 칠 때는 첫 번째 세션에서 가장 큰 긴장을 주었던 것 같은데, 결국에는 제니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누워있던 포즈에서 크게 일어났다. 약간 아차 싶은 생각도 들었고, (제니의 상태를 확인 해가며 연주를 하지는 않았다-인터랙션이 부족했던) 그 후 어차피 첫번째 세션의 마무리 시간이 가까워져 갔기 때문에 압박의 강도를 차츰 차츰 줄이려고 했다. 종료시간 5분전 시그널이 (나는 랩탑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알고있었지만) 영안님한테 제대로 전해지지는 못했고, 어떤 완만한 에너지의 천천한 하강이라기보다는 짜~~~잔! 하는 식으로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즉흥음악은 마무리가 중요한것 같다는 생각을 요새 하는중)
휴식 시간에는 제니로부터 연주가 너무 무서웠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행복한 음악, 교회음악같은 것을 연주해줄 것을 요청받았지만… 사실 난 그런 건 잘 할 줄 모른다. 피아노라도 쳐봐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두번째 세션이 시작됐고, 기타를 꺼내들고 역시 루프를 쌓았다. 중간중간 기타 루프에 변주를 주면서 보컬 루프로 옮기기도, 보컬 루프에서 기타 루프로 옮기기도 했다. 즉흥으로 나온 리프가 계속적으로 반복 되는게 어느 정도 영안님이 소리를 만들어내는데에도 더 편할 거라고 판단한 결과였다. 그래서 어떤 랜덤성이나 의외성은 줄어들었지만 변주를 계속해서 진행하면서 (ADHD특: 어차피 루프로 돌리는거 아니면 계속 연주도 못함) 그런 의외성을 살려보려고 했다. 역시 중간에 제니가 마찬가지로 소리를 질렀고, 그 후부터는 피아노와 오르간을 사용해서 조용하게 진행해보려고 했다. 마지막 5분 전은 영안님과 상의한 대로 드럼 소리를 넣기로 했다. 이번 클로징은 그래도 생각보다는 더 마음에 들게 된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공연이 끝나고, 서로의 드로잉과 생각을 나누는 셰어링 세션이 진행됐다. 시간은 10시가 다 되어가서 마무리가 되었고, 3주 동안 열심히 지지고 볶았던 공연이 드디어 끝이 났다. 뒤풀이를 하면서, 제니는 음악이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얘기해줬다. 이 모든게 즉흥이었다는 것을 몰랐던 향유자 한 분은 나와 제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전 까지는 굉장히 대단한 액팅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제니는 음악에 괴로워서 화가나서 소리 지른 거였다는 걸 알고 나서는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이제부터 할 이 얘기 하려고 지금까지 엄청난 장황설을 한 것 같다. 즉흥협연은 흔히 대화라고 한다. 어떤 모티브나 에너지를 서로 주고받는 대화. 내가 처음 즉흥협연을 접했을 때는 표현 방법의 특이함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럴만도 한 게 무슨 생전 처음 듣도 보도 못한 악기로 혹은 아는 악기라도 듣도 보도 못한 표현법으로 연주를 하는데… 지금 와서는 아 굉장히 겉보기 (혹은 겉듣기가 맞겠지만)에 정신이 팔렸구나 싶었던 거다. 지금은 어느정도 맞는 비유같다.
대화 라는 아날로지를 계속 확장 한다면, “나는 지금 점심 뭐먹지 나 어제 짜장면 먹어서 중국집은 싫어 라고 물어보는데 왜 너는 부정선거 물러나라 공산주의 박멸하자로 대답하니” 정도의 상황이 있을 수가 있고… “나 지금 점심 뭐먹지?” 에 그대로 “나 지금 점심 뭐먹지” 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따라할 수도 있고… 여러가지 상황이 있을 수 있는 것 같다.
더 확장 한다면, 1호선에 가면 광인 할배가 있고, 판교에 가면 판교 사투리를 쓰는 IT 맨들이 있고, 예술장소에 가면 예술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술가들이 일론머스크의 부의 축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처럼 코인주식부동산-신도들은 예술가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대화는 정말 어떤 주제든지 자유롭게 말 할 수 있는 것 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어떤 사람은 어떤 말 밖에는 생각하기 쉽지 않다. 내가 손만 대면 둠이 묻어나오는 것 처럼. 그리고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뜻이다. (물론 어떤 주제든 잘 말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대화'든 잘 해내는 즉흥음악가도 많다!) 이번 공연의 테마도 그랬다. 트라우마도 사랑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고, 밸런스를 잡아야 한다는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뜻이고, 이 공연이 무언가를 위한 치유를 위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그냥 , 나는 여기 있고, 트라우마는 거기 있고, 삶은 계속된다는 얘기를 (최소한 나는) 하고 싶었다.
사람마다 다른 음과 양의 threshold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눈알이 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모든 걸 압도할 (혹은 하고 싶은) 소리를 만들어내는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소리에 대한 threshold랑 제니의 그것은 다른 것 같다. 혹은 즉흥음악에 대한 내 생각과 제니의 생각이 달랐을 수도 있다. 그 날의 공연에서 내가 낸 소리가 어떤 “트라우마는 여기에 이렇게 있고, 그건 그냥 있을 뿐이다. 치유나 해소는 없어.” 라는 식으로 관객들에게 전해졌을까? 그건 내 행동에 대한 내 나름의 선해일 수도 있다. 트라우마 말고도 사랑이라든지 여러가지 테마는 많았으니까. “대화를 깨부수는 발화는 자연재해” 같은 걸까? 화산폭발은 화산 근처에 가지 않으면 되고, 자신이 오픈마인드인지 확인하는 홍대남이 싫으면 홍대에 가지 않으면 된다. 근데 그럴 수 없을 때도, 가끔은 화산에 들어가야 할 때도 홍대남과 멱살을 잡아야 할 때도 있는 것 같다. 라고 한다면 정말 대단한 정당화일수도… 내가 이 음과 양 공연을 다시 하고 싶을까? 급박한 시간으로 정말 힘들었고, 할 수 있다면 좀 더 여유있게 준비 하고싶다. 좀 더 컨셉을 다듬고 가능하면 한 네 명 정도로 음악가를 구성 하는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일단 들어온 섭외나 요청은 거절하지 않는 편) 지금 당장은 공연하면서 든 생각들을 좀 더 정리하고 싶다.
추가적으로;
- 그날 입은 치마는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속바지 라는 것을 입어야 한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됐다. 생각만큼은 시원하진 않았다. 살을 많이 빼야된다는 생각을 더 크게 했다.
- 참가자분 중 한 분이 얘기했던 것 중: "가지고 있는 것으로 특정지어지는 것 보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으로 특정지어지는 것을 주목해서 드로잉을 했다는 말"이 기억에 크게 남는다.
- "비인간적인" 이란 디렉팅이 나에게 너무 강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더 익숙해서 그랬을지도 모름. 남은 감정의 종류가 몇 가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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